함왕혈 (咸王穴)역사 기록 팩트체크 및 학술 기록 고증 - 양평고대사 검증 시리즈(4)
함왕혈 (咸王穴)역사 기록 팩트체크 및 학술 기록 고증 - 양평고대사 검증 시리즈(4)
  • 양평백운신문
  • 승인 2024.03.22 18: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함왕혈은 군장 함왕주악(咸王周鍔)함혁왕(咸赫) 실체적 설화 구전-성읍국가 함왕성(咸王城)복원 시급
▶ 함왕혈
▶ 함왕혈

▶경기도 함왕혈(咸王穴)및 함왕성(咸王城)문화재 조사(1990년)시 양평군 공직자 신교중씨(83세) 증언

 1990년 당시 양평군 문화재 조사 문화공보과 소속 주무관이었던 신교중선생(83)은 “경기도 문화재 지정 일제조사 요청시 양평군내 문화재 70여건을 등록하고자 자료를 보낸 것"으로 회고하고 있다.

함왕혈과 연계된 마한시대 54개 소 성읍국가, 즉 소국의 하나인 일화국(양평 용문산 서록에 웅거) 건국신화는 함왕성지가 있기에 그 설화가 살아있어 맥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함왕성지(咸王城地, 경기도 기념물 제123호, 1990년 9월 6일 지정)가 없다면 함왕혈의 
역사적 개연성과 문화재 또는 향초유적 지정의 당위성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1990년 경기도 기념물 지정 당시, 양평군문화공보과에서 업무를 담당했던 
신교중씨(83, 강상면 신화리, 전 양평의병기념사업회 회장)는 “당시 제28대 오세희(1989.12~1991.12 군수 재임) 관선 군수 시절 경기도 무형, 유형 향토문화유적 
일제 조사 및 신청하라는 공문이 와서 약 70여 개소 문화재를 일괄적으로 새로 
지정하거나 정비한 것으로 기억한다"라며 “아쉬운 점은 당시 인원 부족 및 학술적 
기록을 찾지 못해 함왕성지만 일반 유적 개념으로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고, 함왕혈과 
함씨각 등 일맥 상통하는 일괄유적은 별도로 올리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하며 역사적 충분한 연계성과 그 후 
많은 자료가 뒷받침되고 지역주민들의 향토뿌리로 전승되고 있는 기록이 있는 만큼 이젠 유적을 
세분화하여 하루빨리 경기도 또는 양평군에서 기념물과 향토유적으로 지정을 서둘러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특히 “당시에도 양평읍 양근 7리에 거주하는 故 함순만씨( 향년89)등 함씨 후손들이 함왕혈등 유적관리에 최선을 다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홍천에 사는 함씨 후손의 경우 타 
문중과 함씨 문중이 토지 분쟁 문제로 유적 보존 관리에 많이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또한 “경기도 또한 당시 함왕성지 일괄 유적 보전의 필요성은 충분히 공감했으나 그후 바로 퇴직해 양평군에서 전문적인 공직자와 인력 확보 등 조직 편제가 역부족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함왕혈과 함씨각 등 일괄유적이 향토유적으로써 지정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양평사는 후손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며,
경기도와 양평군의 문화재 보존 및 향토유적 지정 절차 이행 예산 확보와 학예사 등 전문 인력 확충 등 문화재 담당 팀 조작개편이 시급하다"라고 역설했다.

▶ 함왕각
▶ 함왕각

▶함왕혈 역사 근거 기록 및 
학술 기록 팩트 체크

양평 고대사를 기원 전후 100년 원삼국까지 끌어올리는 확정적 가치가 있는 함왕혈과 함왕성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문화재 
지정 시 뒷받침되어야 할 역사적 근거와 연계성이 충분하다.
무엇보다 함왕혈과 함왕산성, 함씨각, 거북상 승전비, 함왕골, 함왕봉, 사나사 당산계 불량비 및 불량답(佛糧畓) 기증 
내역들은 경기도 유형문화재는 물론 경기도 기념물,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게 지역 향토사 
학계의 주장이다. 

함왕혈과 함왕성지의 역사적 사료와 설화의 일관성과 상호 연계성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증적 물증이며,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사료적 가치 또한 전국 함왕성지와 유사한 탄생설화와 유적과 비교할 때 더욱더 돋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관련 양평에서 35년째 향토사학을 연구하고 있는 박모 향토사학자씨(63, 양평군 공흥리)는 “함왕혈의 탄생설화 주인공 함혁왕은 
설화에 ‘함왕주악(咸王周鍔)’으로 표기돼 있지만 이는 용문산 서록 산비탈 악산에 웅거지를 함축해 불린 이름이자 1750년전 당시 약 7000명~ 1만명내외 성읍국가 형태 호족장이자 군장으로써 훗날 함왕으로 통칭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신라 건국 초기 왕의 명칭이 거서간,차차웅,마립간으로 불리웠고, 백제도 초기 어라하로 불리웠음을 상기할때 삼한시대인 덩시에는 '함주악'이 성읍국가 일화국에서 군장의 명칭임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 다른 견해는 양평 향토사학계의 "오랜 세월 발음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이다. 주악의 ‘악’자는 한자로 ‘칼날 악(鍔)’자로 
함왕의 이름 혁(빛날 혁, 赫)의 변형으로 추정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용문산 산록 촛대바위 처럼 우뚝선 바위를 상징하듯 밝은 터전 이란 뜻의 일화국(밝은 화평의 고장이란 뜻)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그후 고구려 양평 지명이 태양을 상징하는 항양(恒陽,항상 밝은 고장), 통일신라때 빈양(濱陽, 물가의 햇빛고장)으로 불리다가 고려때엔 익화(益和)현으로 회귀해 다시 일화국의 화(和)자가 등장하고 있어 삼한시대 함왕국인 '일화국' 명칭이 무려 1500년이상 그 명맥을 도도하게 이어져 오고 있음을 지명에서도 확실하게 고증하고 있다.

▶함왕성을 수록한 실체적 역사 고려사(高麗史,1451년 조선 문종 1년 발간)

고려사는 1451년 조선 문종 1년
1451년(조선 문종 1)에 완성된 고려 시대에 관한 역사책이다. 1449년(세종 
31)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2년 반 만에 완성 후 최종 1454년(단종 2)에 
간행했다.
고려사의 함왕혈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함왕성이 ‘양근 읍성’으로 등장하는데 
조선 영조 때까지 양근군의 관청 소재지였던 옥천면 일원 함왕성이 외적 침입 
시 여전히 읍치(邑治) 성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양근 읍성으로 불렸다. 
고려사의 등장하는 함왕성은 몇 차례 모두 몽고족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일이다. “양근에 살던 사람들이 이곳 양근성에 몽고족을 피해 몸을 숨겼는데 함락되고 말았다.”라는 기록이다.

▶ 함왕성 수록한 역사서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1481년 성종12~1531년 중종)

조선 세조 때의 팔도지리지를 바탕으로 성종 때 노사신, 강희맹, 서거정 등에게 집필하도록 했다. 성종 때 간행된 것을 동국여지승람이고 이를 다시 증보, 개정한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현재는 중중 때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만 남아 있다.

권 6-13 경기도 군현 편에 양근군 ‘함공성(咸公城)’이라는 이름으로 “고려 때 이 성에는 
몽고병을 피해 양근에 살던 사람들이 몸을 숨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함공성(咸公城) 이라고 표기한 것은 고려사엔 함왕성 바로 아래 바로 아래 양근 
지역 고을을 다스리던 읍치가 있었다. 양근 읍성이라 칭한 다음 80여 년이 지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발간될 당시에도 몽고 침략 방어수단으로 성이 이용되던 터라 고려 
개국 공신 함규장군의 주 근거지라는 의미의 함공성이 쓰였다는 것이 향토사 학계의 
정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1)에는 “함공성이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석축으로 둘레가 
2만9.058척이다. 고려 때 고을 사람들이 몽고 군사를 여기에서 피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동국여지승람에서 함공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탓으로 그 이후 몇 차례 관에서 
편찬한 각종 ‘지리지’에는 모두 함왕성이 함공성(咸公城)으로 기록되고 ‘양근 읍성’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다.

▶김정호 주관한 대동지지(大東地志),
여도비지(輿圖備志)에 수록된 함왕성,
1861~1866 철종 12~17)

대동지지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을 간행한 1861년 이후부터 1866년경 사이에 
김정호가 편찬한 32권 15책의 필사본으로 전국 지리지이자 역사 지리지이다. 
대동지지가 김정호가 마지막으로 편찬한 지리지다. 
김정호는 동여편고(1834)도 20책을 필두로 동여도지(1840) 20책, 청구도(1849), 
여도비지(1856, 철종 7년) 20책과 이를 집대성한 대동지지 32권을 15책(1866)을 
편찬하였다. 대동지지는 동대도지를 근간으로 삼고 여도비지(輿圖備誌)를 참고로 
보완하여서 탄생한 지리서였던 것이다. 

특히 대동지지(大東地志) 양근군 편에도 함공성이 함공현(峴)(함공고개)위에 있다고 
했으며, 덧붙여 ‘함공고개는 양근군 소재지로부터 동북쪽으로 35리 지점에 있다 ’고 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함공고개는 일찍이 어느 문헌에도 출현한 적이 없는데 함공성의 
위치와 고개 이름까지 밝히고 어느 방향으로 몇 리 떨어졌는지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는 틀린 것이다. 김정호는 소문과 달리 구석구석을 다니지 않은 것 같다. 
군 소재지를 갈산으로 옮긴 후라 동북쪽이 아닌 서북쪽에 위치하며, 일제 전 조선시대엔 10리가 4km가 아니라 5.3km으로 10km 이내다. 
당시 양근 군 동헌이었던 양일고에서 사나사까지 6.6.km와 사나사에서 함왕성지까지 
1.7km를 감안하면 8.3km 가량 거리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방향과 거리가 틀린 점은 
김정호가 직접 탐사한 결과가 아니라는 심증이지만 함왕성을 거명한 자체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사나사불량비( 사나사 재건불사 시주탑)
▶ 사나사불량비( 사나사 재건불사 시주탑)

▶함왕성을 함공성으로 표기한 이유?

여도비지에서 거론되고 이를 토대로 작성된 대동지지에 함왕성이 기록된 점과 조선시대 
한강 최대 방어진지였음이 기록된 점은 조선시대 한강 전략 진지였음이 분명한데 왜 
함왕성이 아닌 함공성이라 표기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마한 연맹체(54개국, 총 인구 200만명 내외) 일화국 성읍국가(원삼국시대) 시절엔, 큰 국가라 해야 
약 5천 호 규모인지라 ‘함왕성’ 또는 ‘함씨 대왕성’으로 호칭되었다. 그 후 성조 
함혁왕 21세손 함규장군이 고려 왕건을 도와 건국시엔 익찬 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에 책봉됐으며, 그 후 
벼슬이 은청광록대부태위(銀靑光錄大夫太尉) 광평시랑평장사(廣坪詩郞平章事)에 올랐다. 
평장사는 지금의 부총리급이며, 그 후 국무총리급인 대광에 이르렀다. 
함규장군은 함씨 중시조를 왕건에게 사성을 받아 교과서에 왕규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고려가 후삼국 통일 직후인 고려 왕건 태조 20년(937)에 후진 황제 석경당의 즉위 축하 
사절로 중국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벼슬이 대광에 이르러 함규 장군 두 딸이 
왕건의 제15번째와 16번째 왕비(당시 결혼 풍습의 경우 황제는 중혼이 가능)가 되었으며 
왕건의 장남 왕무(해종)에게 시집보낸 셋째 딸은 고려 두 번째 황후가 되었다. 이리하여 
함규장군 사후에 시호로 양후공을 하사받게 되고 황제 아래 ‘왕’의 칭호를 쓰게 되자 
자연스럽게 ‘함왕성’으로 불렸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황제를 모시는 제후 국가가 아닌 조선시대는 ‘왕’의 나라라 ‘왕’의 명칭은 그 누구도 
쓰지 못하게 하였고 왕의 형제는 대군, 그 외 신하는 모두 ‘공’으로 표기 함공성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 함왕산성 우물터와 유허비 탐사 함씨대종회 회원들

▶조선시대 함왕성은 외적방어 핵심요새

조선시대엔 함왕성을 중심으로 남한강 요지에 토성 또는 석성을 쌓았는데 기록에 의하면 
현 양평읍 봉성리에 성터가 있어 임진왜란 때 마을 앞뒤로 성을 쌓았다는 지역인들의 
증언이 전해진다. 또한 양평읍 양근 4리 남한강 일원 양근 섬과 마주 보고 있는 충주산(부래산) 
또는 고산(孤山, 현재 물안개공원)에 있는 성터이다. 

조선 중엽의 김안국은 떠드렁산에서 성을 보고 그의 
기행문에 “허물어진 옛 성의 흔적은 남아 있다.”라고 기록했다. 지금의 떠드렁산과 고 
산정이 있는 물안개 공원이 조성되기 이전에는 감호정이란 정자가 있었으며, 조선시대 
파발 마패를 주고받던 역참 오빈 역이 있었던 만큼 내륙에 있는 함왕성 소속의 남한강 
동태를 파악하는 외곽 성이 있었음을 추측게 한다. 이 또한 발굴이 되지 않아 역사 복원이 
아쉽다 하겠다. 

이 밖에도 함왕성을 호위하던 양서면 '신원리성'이라고 불리는 '부용산성'이 현재 미발굴 상태로 성지 흔적만 방치돼 있다.

2024년 3월22일 태허 박현일 양평군정연구원장(한국사 1급)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